원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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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과 주요 사업=== 원광사의 역사는 정기간행물인 《원광》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원불교는 초기 교단시기부터 교단적인 정기간행물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28년(원기13) 5월 당시 불법연구회가 총회원 438명, 총부 포함 전체 회관(교당) 3개 지부뿐이었던 때에 묵사본 《월말통신》 제3호~제5호를 내기 시작했다. 극심한 경제공황 속에서 1년 동안 휴간하기도 했으나, 1932년(원기17)부터는 《월보》로 개제하여 프린트판으로 20부~50부씩 발간했다. 이후 일제 당국의 검열로 《월보》가 압수당하기도 했으나 제호를 바꾸어 《회보》를 발행했으며, 1934년(원기19)에는 부수를 대폭 늘려서 인쇄본으로 발간했다. 이렇듯 시련을 겪을수록 교단의 정기간행물은 체재를 더욱 튼튼히 하여 끈기 있게 불법연구회의 눈과 귀 노릇을 하다가 1940년(원기25) 일제의 조선 언론 말살정책으로 정간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동인지 《금강(金剛)》이 1946년(원기31) 5월에 프린트판으로 나왔으며, 그 후 《금강》지 편집의 주요 멤버들이 참여하여 1949년(원기34) 7월에 《원광》을 창간되게 되었다. 창간호는 《회보》가 정간된 후 9년 만에 복간된 원불교 교단의 기관지인 셈이다. 제2호 《원광》부터는 이리시내 활문당에서 인쇄했다. 3~4개월 간격으로 부정기적 간행을 하다가 제5호 인쇄가 끝날 무렵, 한국전쟁을 당하여 휴간했다. 4년 후 어느 정도 시국이 안정을 되찾자 이리고등선원 책임자인 이운권이 주선하여 보화당의 지원으로 제6호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고등선원에 사무실을 두고 남성문화사 인쇄로 발행되었다. 발행인은 송혜환(당시 보화당 사장), 주간은 이운권이었으며, 편집 실무는 이은석과 이종원이 담당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이종원이 106호를 발행할 때까지 26년 동안 《원광》지 발간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1955년(원기40) 3월 제9호부터 원광사는 원불교 중앙총부로 옮겨 당시 도서실 건물(현 종법실 자리)에 간판을 걸고 업무를 보았다. 주간에 이공전(당시 법무실장 겸임), 편집진으로는 이종원ㆍ이중정ㆍ김석정이었다. 동년 3월에 박은섭이 원광사 총무로 부임하여 원광사 자영 인쇄시설을 모색하다가 부산의 교도 김백련의 희사로 1958년(원기43) 1월 20일에 인쇄기를 도입하게 되자 원광사는 종전의 편집실만 있던 체제에서 인쇄소 시설을 함께 갖춘 문화기관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자영 인쇄시설을 갖춘 원광사는 전문 인쇄기술자를 초빙하는 등 인력을 보강하여 인쇄 영업을 시작했다. 한편 교단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기관지 발행 외에 1958년(원기43)에 최초의 단행본인 《설화집》을 발행했다. 1959년(원기44) 중앙총부 교무부장인 이은석이 원광사 주간을 겸임하게 되어 《원광》 32호부터 제54호까지는 원불교 교정원 교무부 산하 편수과와 긴밀한 협조 아래 발간하게 되었으며, 이때 편수과 주사 송천은이 편집보조를 맡아 근무했다. 1961년(원기46) 원불교 교단은 숙원 사업인 경전 발간에 거교적인 힘을 기울였다. 기본 경전인 《원불교교전》을 발간하기로 하고 그 편집을 완료하게 되자 원광사 실무자들은 처음으로 인쇄되는 경전을 원광사에서 인쇄하기 위해 교서의 편집과 발행을 주관하는 기관인 정화사와 수차 협의를 거듭했다. 당시 원광사 실무자들은 처음 인쇄ㆍ발행되는 《원불교교전》을 교단의 기관인 원광사에서 인쇄하고 싶어했으며, 꼭 해야만 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사업의 중요성과 비례하여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일인 만큼 서울 큰 인쇄소에서 인쇄할 비용으로 원광사 시설을 보강하면 원광사도 좋아지고 여러 가지로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한 정화사 관계자들은 큰 인쇄소에 지불할 인쇄비용으로 시설은 가능하다 할지라도 원광사의 인쇄 기술로는 처음 발행하는 《원불교교전》을 경전답게 발간할 수 없다는 기술적인 문제를 들어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후 원광사 경영진은 인쇄 시설 보강으로 주조기와 자모를 구입하여 조판만 하고, 인쇄와 제본 등은 서울의 일류시설에서 진행하겠다는 새로운 안을 냈으나, 이 안에 대해서도 원광사 직원들 외에는 거의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초의 경전을 직접 발간하지는 못했으나 시설과 기술을 보강하여 1962년(원기47)에 종법사인 정산의 열반을 계기로 정산의 법설을 모아 9월에 선진유고선집 1권으로 《정산종사법설집》을 발행하여 전국의 교당에 배본했다. 이 법설집은 교단에서 교단 시설로는 처음으로 발간한 교단 관계 단행본이었으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원광사는 외부의 일류 인쇄소와의 경쟁에도 뒤지지 않는 기술을 인증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만큼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5ㆍ16 이후, 한때 《원광》이 납본 불이행 건으로 정간당하기도 했으나 곧 수습하여 속간했다. 1963년(원기48) 원광사는 체제를 정비하여 초대 사장에 김영신이 취임했으나 이듬해에 김홍철 사장 명의로 등록했다. 원광사의 책임자를 사장으로 발령한 것은 이제까지 원광사가 교단 기관지 《원광》의 편집과 운영을 같이하면서 책임자를 주간 또는 발행인이라고 호칭했던 시대와 구분되는 한 분기점이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원광사는 기관지 《원광》의 편집ㆍ발행보다 인쇄 사업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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