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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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인쇄업으로 도약=== 1964년(원기49) 9월, 동화병원 자리로 사옥을 옮긴 원광사는 대외적인 영업을 하기 위해 제반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6년(원기51) 신문 인쇄를 하기 위해 8페이지 인쇄기를 구입했으며, 1968년에는 8포인트 주조기 자모 2천종과 대형 인쇄기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원불교청년회에서 발행하는 《청년회보》와 원광대학에서 발행하는 《원대학보》와도 정기 인쇄 계약을 체결했다. 이때부터 잡판인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문인쇄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춤과 동시에 대형판 인쇄를 할 수 있는 기술 축적을 하게 되었다. 1969년(원기54) 4월, 적극적으로 대외적인 영업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인쇄소를 전북 이리시 평화동 소재 원광여자중고등학교 부속 건물로 이전했다. 또한 이 해에 새로 창간된 《원불교신보》의 공무국으로 약정 계약을 맺고, 격주간제로 정기 인쇄를 시작했다. 동년 7월, 단행본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의 필요성을 느낀 원광사는 ‘원불교출판사’를 출범시켰고, 《원광》지도 문화공보부에 계간으로 등록했다. 출판사 사장에는 당시 교정원장인 박장식, 편집인은 교무부장 김근수, 주간은 《원광》 편집장 이종원이 임명되었다. 원불교출판사 발족과 함께 교단 인쇄사상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축쇄판(포켓용) 《원불교교전》(《성가》 합권)을 발간했다. 그 당시 원광사 실무진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교도들도 간편하게 소지하고 다니며 볼 수 있는 축쇄판 교전 발행의 의견을 내놓았으나 처음엔 신성한 교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불경스러운 짓을 할 수 없고, 교전이 작으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교역자들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봉착했다. 그러나 다른 종단에서도 경전을 작게 발행함은 물론 부분 부분을 별책으로도 내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음에 자신을 갖고 발간하게 되었다. 축쇄판 교전이 발행되자 교역자들의 여론과는 반대로 교도들의 수요가 급증하여 오히려 큰 교전보다 수요자가 더 많았다. 성가도 함께 수록하여 《교전》과 《성가》 두 권을 가져야 법회를 보았는데 간편하게 한 권이 되어 더 호응을 얻었다. 1971년(원기56) 4월, 제2대 사장으로 이백철이 부임했으며, 이 해에 특기할 만한 사업으로 원불교 교단 반백년을 문화사적으로 조감하여 편찬한 《원불교개교반백년기념문총》을 발간했는데 이는 교단 문화사업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으로 그 당시로서는 큰 출혈을 해가며 내놓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원기59) 11월, 제3대 원광사 사장으로 조정근이 부임하면서 남중동 구 천일고무공장 자리로 사옥을 옮겼다. 이때까지 시설 투자로 빚에 짓눌려 있던 원광사의 경영을 쇄신하여 만성적인 부채를 청산하고 적은 기금이지만 자체 사업자금을 적립하게 되니 이는 원광사 발전의 또 하나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원기62) 이광정이 제4대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설을 확장했다. 1979년(원기64)에 원불교 중앙문화회관이 중앙총부 정문 옆에 준공되면서 원광사는 총부 곁으로 돌아왔다. 애당초 원광사는 총부의 중심지인 현 종법실 자리에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숱한 이사 끝에 30년 만에 총부 정문 옆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안정된 새 사옥에 정착하게 되면서 원광사는 비약적인 컬러인쇄시대를 전개하게 된다. 1982년(원기67) 6월, 박정기가 전무로 부임하면서 원광사는 다시 한번 큰 변혁을 가져온다. 활판인쇄가 인건비의 과다 지출, 제작 시일의 지연 등으로 계속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함을 통감하고 활판인쇄시대의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컬러 오프셋 인쇄 체제를 보강했다. 1983년(원기68) 2월, 제5대 사장으로 이공전이 취임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박정기 전무가 부사장으로, 심도윤 상무가 전무로 승진했다. 《원광》 창간 멤버였던 이공전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교서출판 업무를 중앙총부 교화부와 협의하여, 7대교서만 교화부에서 관장키로 하고 그밖에 모든 교재는 원불교출판사에서 취급하기로 업무 한계를 분명히 했다. 이어서 1985년(원기70) 9월에는 원불교출판사를 독립기관으로 발족시켰다. 1986년(원기71) 1월, 《원불교자료총서》(영인본 10권, 별책 부록 1권)를 발간한 공적으로 원불교 중앙문화원으로부터 《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원기73) 1월, 부사장인 박정기가 제6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해 9월, 영인본 《문연각사고전서》 70질을 제작했다. 이 책은 한 질이 1,209권으로 엄청난 제작비와 노력이 필요한 거대 사업이었다. 1995년(원기80) 1월에 전무 심도윤이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출판ㆍ인쇄ㆍ제본 시설을 현대화했다. 우리나라 출판ㆍ디자인계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밀려옴에 발맞추어 원광사는 서울에 원광기획 디자인실을 개설하고 원불교출판사 서울지점도 옆 사무실에 함께 개설했다. 원광기획 디자인실은 1996년(원기81) 4월,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58-9번지에 자리한 원불교종로교당 1층을 임대하여 개설하고 각종 컴퓨터 및 제 시설을 갖추는 등 활발히 작업에 임했다. 이 원광기획 디자인실은 2004년(원기89) 8월에 원광사와 통폐합될 때까지 서울의 새로운 출판ㆍ디자인 기술 도입에 앞장섰다. 새로 창설한 ‘원음방송’이 원불교문화회관에 입주함에 따라 원광사는 익산시 익산대로 551(신용동 320-2)에 단독건물을 신축 이전했으며, 제7대 사장으로 심도윤이 취임했으며, 임규호가 전무로 승진했다. 이로써 원광사는 독립된 사옥에서 기획부터 편집ㆍ인쇄ㆍ제본까지 일괄적으로 처리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인쇄문화의 메카로 거듭나게 되었다. 〈朴光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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