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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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광사

  • 원광사 [圓光社]

원불교대사전

개요

원불교 문화기관으로 교단의 각종 간행물을 편집ㆍ인쇄ㆍ제본ㆍ발간하는 인쇄소 겸 출판사. 원광사는 학교법인 원광학원의 수익기관으로 초기에는 교단의 주요 정기간행물인 《원광》 및 《원불교신문》의 발행에 치중하다가 차츰 교단이 성장함에 따라 월간 원광사와 원불교출판사를 독립기관으로 탄생시킨 후, 본래의 인쇄 출판 업무에만 임하고 있다.

설립

원광사는 1949년(원기34)에 원불교 제2대 종법사인 정산종사의 유시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정산은 우리나라가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 3년째 되던 해인 1948년(원기33)에 종전의 교명인 ‘불법연구회’를 ‘원불교’로 개명하고, 교단 인재 양성기관인 유일학림 1기생이 졸업하자 졸업생 중 이은석을 주간으로, 이공전을 편집장으로 선발하여 교단기관지 《원광》을 창간토록 하고 이를 위해 1949년 4월 1일 원광사를 발족시켰다.

정산이 기관지 이름을 ‘원광’이라 한 것은 “일원의 광명이 온 누리에 두루 비치라”는 교세 확장의 염원을 함축하고 있으며, 기관지인 《원광》 제2호 권두에 ‘일원지광 편조시방(一圓之光 遍照十方)’이라는 정산의 휘호를 제자(題字)로 실었다. 기관지 《원광》은 5호를 내고 한국전쟁으로 중단되었다가 1952년(원기37) 4월에 보화당과 이리고등선원이 합력하여 복간했으며, 1955년(원기40) 3월에 총부로 시설을 옮긴 후, 1957년(원기42)에 교도(부산 김백련)의 후원으로 자영 인쇄 시설을 갖추고, 교단 출판업무의 일부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교세의 성장에 따라 중등교육기관인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설립되자 원광이라는 이름이 학교 이름에도 사용되었으며, 고등교육기관인 유일학림도 원광대학으로 그 명칭을 바꾸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교단의 중요기관이 설립될 때마다 원광이라는 이름이 자연스럽게 붙여져서 원광은 일반인들에게 원불교기관의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발전과 주요 사업

원광사의 역사는 정기간행물인 《원광》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원불교는 초기 교단시기부터 교단적인 정기간행물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1928년(원기13) 5월 당시 불법연구회가 총회원 438명, 총부 포함 전체 회관(교당) 3개 지부뿐이었던 때에 묵사본 《월말통신》 제3호~제5호를 내기 시작했다. 극심한 경제공황 속에서 1년 동안 휴간하기도 했으나, 1932년(원기17)부터는 《월보》로 개제하여 프린트판으로 20부~50부씩 발간했다. 이후 일제 당국의 검열로 《월보》가 압수당하기도 했으나 제호를 바꾸어 《회보》를 발행했으며, 1934년(원기19)에는 부수를 대폭 늘려서 인쇄본으로 발간했다.

이렇듯 시련을 겪을수록 교단의 정기간행물은 체재를 더욱 튼튼히 하여 끈기 있게 불법연구회의 눈과 귀 노릇을 하다가 1940년(원기25) 일제의 조선 언론 말살정책으로 정간을 당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로부터 6년 뒤, 일제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 동인지 《금강(金剛)》이 1946년(원기31) 5월에 프린트판으로 나왔으며, 그 후 《금강》지 편집의 주요 멤버들이 참여하여 1949년(원기34) 7월에 《원광》을 창간되게 되었다. 창간호는 《회보》가 정간된 후 9년 만에 복간된 원불교 교단의 기관지인 셈이다. 제2호 《원광》부터는 이리시내 활문당에서 인쇄했다.

3~4개월 간격으로 부정기적 간행을 하다가 제5호 인쇄가 끝날 무렵, 한국전쟁을 당하여 휴간했다. 4년 후 어느 정도 시국이 안정을 되찾자 이리고등선원 책임자인 이운권이 주선하여 보화당의 지원으로 제6호를 발간하게 되었는데 이로부터 고등선원에 사무실을 두고 남성문화사 인쇄로 발행되었다. 발행인은 송혜환(당시 보화당 사장), 주간은 이운권이었으며, 편집 실무는 이은석과 이종원이 담당했다. 이때부터 시작하여 이종원이 106호를 발행할 때까지 26년 동안 《원광》지 발간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1955년(원기40) 3월 제9호부터 원광사는 원불교 중앙총부로 옮겨 당시 도서실 건물(현 종법실 자리)에 간판을 걸고 업무를 보았다. 주간에 이공전(당시 법무실장 겸임), 편집진으로는 이종원ㆍ이중정ㆍ김석정이었다. 동년 3월에 박은섭이 원광사 총무로 부임하여 원광사 자영 인쇄시설을 모색하다가 부산의 교도 김백련의 희사로 1958년(원기43) 1월 20일에 인쇄기를 도입하게 되자 원광사는 종전의 편집실만 있던 체제에서 인쇄소 시설을 함께 갖춘 문화기관의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자영 인쇄시설을 갖춘 원광사는 전문 인쇄기술자를 초빙하는 등 인력을 보강하여 인쇄 영업을 시작했다.

한편 교단 문화사업의 일환으로 기존의 기관지 발행 외에 1958년(원기43)에 최초의 단행본인 《설화집》을 발행했다. 1959년(원기44) 중앙총부 교무부장인 이은석이 원광사 주간을 겸임하게 되어 《원광》 32호부터 제54호까지는 원불교 교정원 교무부 산하 편수과와 긴밀한 협조 아래 발간하게 되었으며, 이때 편수과 주사 송천은이 편집보조를 맡아 근무했다. 1961년(원기46) 원불교 교단은 숙원 사업인 경전 발간에 거교적인 힘을 기울였다.

기본 경전인 《원불교교전》을 발간하기로 하고 그 편집을 완료하게 되자 원광사 실무자들은 처음으로 인쇄되는 경전을 원광사에서 인쇄하기 위해 교서의 편집과 발행을 주관하는 기관인 정화사와 수차 협의를 거듭했다. 당시 원광사 실무자들은 처음 인쇄ㆍ발행되는 《원불교교전》을 교단의 기관인 원광사에서 인쇄하고 싶어했으며, 꼭 해야만 되겠다는 명분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사업의 중요성과 비례하여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일인 만큼 서울 큰 인쇄소에서 인쇄할 비용으로 원광사 시설을 보강하면 원광사도 좋아지고 여러 가지로 수월하게 일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편집과 발행을 담당한 정화사 관계자들은 큰 인쇄소에 지불할 인쇄비용으로 시설은 가능하다 할지라도 원광사의 인쇄 기술로는 처음 발행하는 《원불교교전》을 경전답게 발간할 수 없다는 기술적인 문제를 들어 불가능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후 원광사 경영진은 인쇄 시설 보강으로 주조기와 자모를 구입하여 조판만 하고, 인쇄와 제본 등은 서울의 일류시설에서 진행하겠다는 새로운 안을 냈으나, 이 안에 대해서도 원광사 직원들 외에는 거의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초의 경전을 직접 발간하지는 못했으나 시설과 기술을 보강하여 1962년(원기47)에 종법사인 정산의 열반을 계기로 정산의 법설을 모아 9월에 선진유고선집 1권으로 《정산종사법설집》을 발행하여 전국의 교당에 배본했다. 이 법설집은 교단에서 교단 시설로는 처음으로 발간한 교단 관계 단행본이었으며, 좋은 반응을 얻게 되자 원광사는 외부의 일류 인쇄소와의 경쟁에도 뒤지지 않는 기술을 인증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만큼 자신감도 얻게 되었다.

5ㆍ16 이후, 한때 《원광》이 납본 불이행 건으로 정간당하기도 했으나 곧 수습하여 속간했다. 1963년(원기48) 원광사는 체제를 정비하여 초대 사장에 김영신이 취임했으나 이듬해에 김홍철 사장 명의로 등록했다. 원광사의 책임자를 사장으로 발령한 것은 이제까지 원광사가 교단 기관지 《원광》의 편집과 운영을 같이하면서 책임자를 주간 또는 발행인이라고 호칭했던 시대와 구분되는 한 분기점이 된 것이었다. 이때부터 원광사는 기관지 《원광》의 편집ㆍ발행보다 인쇄 사업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종합 인쇄업으로 도약

1964년(원기49) 9월, 동화병원 자리로 사옥을 옮긴 원광사는 대외적인 영업을 하기 위해 제반 시설을 갖추기 시작했다. 1966년(원기51) 신문 인쇄를 하기 위해 8페이지 인쇄기를 구입했으며, 1968년에는 8포인트 주조기 자모 2천종과 대형 인쇄기를 도입했다. 그리하여 원불교청년회에서 발행하는 《청년회보》와 원광대학에서 발행하는 《원대학보》와도 정기 인쇄 계약을 체결했다. 이때부터 잡판인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신문인쇄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춤과 동시에 대형판 인쇄를 할 수 있는 기술 축적을 하게 되었다.

1969년(원기54) 4월, 적극적으로 대외적인 영업활동을 전개하기 위해 인쇄소를 전북 이리시 평화동 소재 원광여자중고등학교 부속 건물로 이전했다. 또한 이 해에 새로 창간된 《원불교신보》의 공무국으로 약정 계약을 맺고, 격주간제로 정기 인쇄를 시작했다. 동년 7월, 단행본을 전문적으로 펴내는 출판사의 필요성을 느낀 원광사는 ‘원불교출판사’를 출범시켰고, 《원광》지도 문화공보부에 계간으로 등록했다. 출판사 사장에는 당시 교정원장인 박장식, 편집인은 교무부장 김근수, 주간은 《원광》 편집장 이종원이 임명되었다.

원불교출판사 발족과 함께 교단 인쇄사상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축쇄판(포켓용) 《원불교교전》(《성가》 합권)을 발간했다. 그 당시 원광사 실무진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일반교도들도 간편하게 소지하고 다니며 볼 수 있는 축쇄판 교전 발행의 의견을 내놓았으나 처음엔 신성한 교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불경스러운 짓을 할 수 없고, 교전이 작으면 품위가 떨어진다는 교역자들의 강력한 반대 여론에 봉착했다. 그러나 다른 종단에서도 경전을 작게 발행함은 물론 부분 부분을 별책으로도 내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음에 자신을 갖고 발간하게 되었다.

축쇄판 교전이 발행되자 교역자들의 여론과는 반대로 교도들의 수요가 급증하여 오히려 큰 교전보다 수요자가 더 많았다. 성가도 함께 수록하여 《교전》과 《성가》 두 권을 가져야 법회를 보았는데 간편하게 한 권이 되어 더 호응을 얻었다. 1971년(원기56) 4월, 제2대 사장으로 이백철이 부임했으며, 이 해에 특기할 만한 사업으로 원불교 교단 반백년을 문화사적으로 조감하여 편찬한 《원불교개교반백년기념문총》을 발간했는데 이는 교단 문화사업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자부심으로 그 당시로서는 큰 출혈을 해가며 내놓은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1974년(원기59) 11월, 제3대 원광사 사장으로 조정근이 부임하면서 남중동 구 천일고무공장 자리로 사옥을 옮겼다. 이때까지 시설 투자로 빚에 짓눌려 있던 원광사의 경영을 쇄신하여 만성적인 부채를 청산하고 적은 기금이지만 자체 사업자금을 적립하게 되니 이는 원광사 발전의 또 하나 전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1977년(원기62) 이광정이 제4대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시설을 확장했다. 1979년(원기64)에 원불교 중앙문화회관이 중앙총부 정문 옆에 준공되면서 원광사는 총부 곁으로 돌아왔다.

애당초 원광사는 총부의 중심지인 현 종법실 자리에 간판이 걸려 있었는데 숱한 이사 끝에 30년 만에 총부 정문 옆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 안정된 새 사옥에 정착하게 되면서 원광사는 비약적인 컬러인쇄시대를 전개하게 된다. 1982년(원기67) 6월, 박정기가 전무로 부임하면서 원광사는 다시 한번 큰 변혁을 가져온다. 활판인쇄가 인건비의 과다 지출, 제작 시일의 지연 등으로 계속 적자 운영을 면치 못함을 통감하고 활판인쇄시대의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컬러 오프셋 인쇄 체제를 보강했다.

1983년(원기68) 2월, 제5대 사장으로 이공전이 취임했으며 이듬해 3월에는 박정기 전무가 부사장으로, 심도윤 상무가 전무로 승진했다. 《원광》 창간 멤버였던 이공전이 사장으로 부임하면서 교서출판 업무를 중앙총부 교화부와 협의하여, 7대교서만 교화부에서 관장키로 하고 그밖에 모든 교재는 원불교출판사에서 취급하기로 업무 한계를 분명히 했다. 이어서 1985년(원기70) 9월에는 원불교출판사를 독립기관으로 발족시켰다. 1986년(원기71) 1월, 《원불교자료총서》(영인본 10권, 별책 부록 1권)를 발간한 공적으로 원불교 중앙문화원으로부터 《출판문화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88년(원기73) 1월, 부사장인 박정기가 제6대 사장으로 취임했으며, 같은해 9월, 영인본 《문연각사고전서》 70질을 제작했다. 이 책은 한 질이 1,209권으로 엄청난 제작비와 노력이 필요한 거대 사업이었다. 1995년(원기80) 1월에 전무 심도윤이 부사장으로 승진하여 출판ㆍ인쇄ㆍ제본 시설을 현대화했다. 우리나라 출판ㆍ디자인계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밀려옴에 발맞추어 원광사는 서울에 원광기획 디자인실을 개설하고 원불교출판사 서울지점도 옆 사무실에 함께 개설했다.

원광기획 디자인실은 1996년(원기81) 4월,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58-9번지에 자리한 원불교종로교당 1층을 임대하여 개설하고 각종 컴퓨터 및 제 시설을 갖추는 등 활발히 작업에 임했다. 이 원광기획 디자인실은 2004년(원기89) 8월에 원광사와 통폐합될 때까지 서울의 새로운 출판ㆍ디자인 기술 도입에 앞장섰다. 새로 창설한 ‘원음방송’이 원불교문화회관에 입주함에 따라 원광사는 익산시 익산대로 551(신용동 320-2)에 단독건물을 신축 이전했으며, 제7대 사장으로 심도윤이 취임했으며, 임규호가 전무로 승진했다. 이로써 원광사는 독립된 사옥에서 기획부터 편집ㆍ인쇄ㆍ제본까지 일괄적으로 처리하게 됨으로써 명실상부한 인쇄문화의 메카로 거듭나게 되었다. 〈朴光秀〉